자연어 처리(NLP)를 활용한 의료 기록 분석
병원에서 환자를 진료한 뒤 남기는 수많은 의료 기록들. 이 기록들은 단순한 데이터의 집합이 아니라, 환자의 병력과 증상, 의사의 판단과 치료 방향, 그리고 전반적인 의료 경험이 녹아 있는 살아 있는 텍스트입니다. 의료진이 이 기록을 작성하는 이유는 단순히 행정적인 의무를 넘어서, 환자의 상태를 더 정밀하게 이해하고 최적의 치료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록은 대부분 자유 형식의 문장으로 작성되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정보를 분석하고 활용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제가 자연어 처리(NLP, Natural Language Processing)에 흥미를 갖게 된 것도 바로 이 지점에서였습니다. 인공지능의 다른 분야보다도 NLP는 의료 현장의 실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실감과 기대를 주었고, 실제로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다양한 가능성과 도전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구조화되지 않은 텍스트 속에서 의미를 찾다
의료 현장에서 생성되는 정보의 대부분은 비정형 텍스트입니다. 진료 소견서, 간호 일지, 퇴원 요약서, 수술 기록, 임상 회진 노트 등은 정해진 틀 없이 의사의 표현 방식에 따라 자유롭게 쓰입니다. 기존의 의료정보시스템(EHR)은 수치나 코드 기반의 구조화된 정보만을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었기에, 이 방대한 텍스트는 오랫동안 활용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연어 처리는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입니다. 예를 들어, 특정 질병명을 자동으로 인식하거나 투약 정보, 검사 결과, 진단명을 문장 속에서 추출해내는 것은 이제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수준까지 발전했습니다. 제가 진행했던 실습 프로젝트 중 하나는 퇴원 요약서를 분석하여 환자의 주요 진단명과 약물 정보를 자동 추출하는 것이었는데, 단어 간 관계와 문맥을 파악해 '고혈압', '고혈압증', '혈압 상승' 등의 표현을 모두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하고 분류해낼 수 있었습니다.
특히 부정어 처리나 시제 판별 같은 세밀한 언어 처리 기능이 정확도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을 확인하면서, 단순한 단어 매칭을 넘어선 NLP의 진정한 힘을 체감할 수 있었습니다.
임상 지식 기반 NLP 시스템의 실전 활용
최근에는 의료 지식 그래프와의 결합을 통해 더 정교한 의료 NLP 시스템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EHR에 남겨진 수천 개의 자유 텍스트 데이터를 분석하여 환자의 위험 요소를 자동으로 탐지하거나, 숨겨진 증상 패턴을 발견해 조기 진단을 지원하는 모델들이 실제 병원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일부 병원에서는 NLP 기반의 시스템이 임상시험 대상자 선별에 활용되기도 합니다. 연구자가 설정한 조건에 부합하는 환자를 수동으로 찾는 데는 수개월이 걸릴 수도 있는데, NLP 시스템은 관련 의료 기록을 빠르게 분석해 적합 후보군을 추천해 줍니다. 또한 최근에는 대규모 언어모델(GPT 계열)을 기반으로 한 진료 기록 요약 시스템도 연구되고 있으며, 수술 기록, 응급실 진료 기록 등을 핵심 정보만으로 정리해주어 의료진의 업무 효율을 크게 높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관련 기술 도입이 서서히 확대되고 있습니다.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NLP 기술을 활용한 간호일지 분석, 병동 보고 자동화, 진단서 요약 등의 시스템이 도입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의료 데이터의 활용도가 점점 넓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음성 기반의 실시간 진료 기록 입력 시스템도 연구되고 있어, 의료진이 손으로 기록을 작성하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환자와의 대화를 통해 의료 정보를 시스템에 축적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현실 속 제약과 언어 모델의 한계
그러나 NLP 기술이 의료 현장에서 활발히 활용되기 위해서는 아직 넘어야 할 산도 많습니다. 첫 번째는 의료 언어 자체의 복잡성입니다. 일반적인 뉴스 기사나 SNS 데이터와 달리, 의료 기록은 방대한 전문 용어, 약어, 그리고 개인의 문체적 차이가 혼재되어 있어 모델 학습이 쉽지 않습니다. 특히 같은 증상도 표현 방식에 따라 '가슴 통증', '흉통', '심부담', '답답함' 등으로 다양하게 기술되며, 이를 정확히 해석하지 못하면 모델의 정확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두 번째는 데이터 부족과 보호 문제입니다. 의료 기록은 개인정보 보호법에 따라 민감한 정보로 분류되며, 연구 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복잡한 비식별화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이로 인해 고품질 의료 텍스트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이 어렵고, 다양한 환자 집단을 대표하는 데이터를 충분히 학습시키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모델의 일반화 성능을 떨어뜨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설명 가능성 문제입니다. 특히 대규모 언어 모델의 경우 결과는 잘 나오지만, 그 결과에 대한 논리적 설명이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의료는 설명과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한 분야이기 때문에, 왜 이 문장을 그렇게 해석했는지, 어떤 기준으로 질병명을 추천했는지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의료 NLP 분야에서는 단순 정확도보다 '설명 가능한 AI(Explainable AI)'가 핵심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
자연어 처리는 이제 단순한 언어 기술을 넘어서, 의료의 진정한 조력자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비정형 텍스트 데이터의 잠재력을 끌어올려 의사결정과 연구의 기반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하는 NLP의 가치는 매우 큽니다. 저는 NLP 기술이 의료진의 업무 부담을 줄이고, 환자의 상태를 더 정확히 이해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가능성을 느끼고 있으며, 이 분야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싶다는 열망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술은 언제나 사람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의료 기록은 단지 텍스트가 아니라, 환자의 고통과 회복이 녹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자연어 처리가 이 이야기를 더 깊이 이해하고, 더 정밀하게 분석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기술은 인간적인 의료를 가능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의료 NLP 기술이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고, 의료진의 판단을 더 명확하게 해주는 방향으로 발전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서, 기술과 의료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