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행을 꿈꾸게 된 계기
나는 언제부턴가 여행이 그리워졌다. 단순히 휴가를 떠나고 싶다기보다는, '잠시 멈추고 싶은 마음'이 강했다. 반복되는 업무와 인간관계 속에서 번아웃이 찾아왔고, 그때 문득 파이어족의 삶 속에서 여행이란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졌다. 내가 원하는 여행은 무리하게 일정을 끼워 넣는 짧은 휴가가 아니라, 내 호흡대로 걸을 수 있는 장기 여행이었다.
2. 장기 여행은 곧 생활
장기 여행을 계획하며 가장 먼저 한 생각은, '여행도 결국 생활이다'라는 점이었다. 짧은 여행처럼 숙소를 비싸게 잡고, 매일 외식을 하고, 유명 관광지를 도는 방식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나는 장기 여행을 '타지에서 살아보기'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여행지를 고를 때도 '볼거리'보다 '살기 좋은가'를 기준으로 삼았다.
물가, 대중교통, 치안, 인터넷 환경, 현지인들의 분위기, 그리고 도서관이나 공원 같은 생활 인프라를 중심으로 도시를 분석했다. 그렇게 찾은 첫 여행지는 일본의 후쿠오카였다. 서울보다 느리지만 편리하고, 조용하지만 지루하지 않은 도시였다.
3. 예산 설계: 하루 단가 계산하기
장기 여행을 위해 나는 먼저 하루에 얼마를 쓰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 달 예산을 잡는 것보다, 하루 예산을 세분화하는 게 훨씬 실용적이었다. 나는 하루 식비 10,000원, 교통비 3,000원, 기타 생활비 5,000원 정도로 계산했다.
숙소는 에어비앤비에서 월 단위로 빌릴 수 있는 곳을 찾았다. 대부분 한 달에 60만 원 이하인 곳을 골랐다. 그러면 하루 숙박비는 약 2만 원. 이렇게 계산해보니, 하루 총지출이 약 3만5천 원 정도였고, 한 달이면 100만 원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장기 여행을 가능하게 한 건, 바로 이 '계산'이었다. 내가 쓸 수 있는 돈과 실제 필요한 돈의 차이를 현실적으로 바라보는 것. 그래서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여행을 이어갈 수 있었다.
4. 수입과 연결된 여행 설계
나는 블로그 수익과 디자인 외주, 그리고 배당금으로 소소한 수입이 있었다. 장기 여행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이 수입을 여행과 연결하는 구조로 만들었다. 예를 들어, 여행 중 겪는 이야기들을 콘텐츠로 정리해 블로그에 업로드했고, 사진이나 에세이는 전자책으로도 만들 준비를 했다.
현지에서 간단한 리모트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도 갖추었다. 꼭 노트북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스마트폰과 클라우드 기반의 툴만으로도 충분히 작업이 가능했다. 이렇게 수입과 여행이 연결되니, 여행은 더 이상 '소비'가 아닌 '순환'이 되었다.
5. 최소화된 짐, 최대한의 자유
장기 여행의 또 다른 핵심은 '짐'이었다. 배낭 하나에 내 삶을 담는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고, 또 생각보다 가벼웠다. 여행 초반에는 이것저것 챙기다가, 2주 만에 절반은 택배로 다시 돌려보냈다. 결국 내게 꼭 필요한 건 노트북, 5벌의 옷, 세면도구, 그리고 노트 한 권뿐이었다.
짐이 가벼워지자 내 움직임도 자유로워졌다. 한 도시에서 한 도시로 옮길 때도 스트레스가 적었고, 마음이 변해도 부담 없이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 있었다. '가지고 있는 것'보다 '가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자유를 주는지 실감했다.
6. 예기치 못한 상황과 대처법
장기 여행 중에는 예상 못한 일들도 많았다. 숙소 예약이 꼬이거나, 교통편이 연기되거나, 날씨 때문에 일정을 변경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계획을 버리는 용기'를 배웠다.
처음엔 일정이 흐트러지면 불안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오히려 그런 순간이 여행의 묘미라는 걸 깨달았다. 갑작스럽게 발견한 동네 서점, 비 오는 날 들린 조용한 찻집, 낯선 사람이 건네준 이야기. 이런 예측 불가능성이 오히려 내 여행을 풍요롭게 했다.
7. 외로움과 고요함의 경계
혼자 하는 장기 여행은 외롭다. 특히 저녁시간, 식사를 혼자 할 때, 말 한마디 없는 하루가 계속될 때면 공허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진짜 나와 마주할 수 있었다.
매일 분주하게 살아오며 미뤄뒀던 감정들,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 묻어둔 상처들이 떠올랐고, 나는 그 모든 것을 조용히 기록했다. 혼자 걷는 여행은 때때로 거울과 같았다. 힘들지만 성장하는 느낌이 분명히 있었다.
8. 돌아와서 달라진 삶
장기 여행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더 적은 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고, 무엇보다 시간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었다. 예전엔 시간을 돈으로 바꾸려 애썼다면, 이제는 돈을 시간을 위해 쓰려 한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나는 일하는 방식을 줄이고, 글을 쓰는 시간을 늘렸다. 외부의 시선을 덜 의식하게 되었고, 나만의 속도로 사는 용기를 얻게 되었다. 장기 여행은 내게 단순한 쉼이 아니라 삶을 리셋할 수 있는 기회였다.
9. 나의 생각
파이어족으로서의 장기 여행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시간에 대한 감각이 달라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절약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었고, 그 수단 덕분에 나는 진짜 나답게 살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얻었다.
누군가는 말한다. 그렇게까지 아끼면서 왜 여행을 하냐고. 하지만 나는 말하고 싶다. '그렇게 아꼈기에 가능한 여행'이라고. 장기 여행은 내게 삶의 방향을 다시 묻는 질문이었고, 그 답을 찾는 긴 산책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여행을 꿈꾸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도, 매일이 여행처럼 살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