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돈에서 벗어난 순간, 공허함이 찾아왔다
파이어족으로 조기 은퇴를 선언하고 나서 처음 며칠은 꿈같았다. 아침에 눈을 떠도 출근할 필요가 없었고, 메일함을 확인하지 않아도 아무도 나를 재촉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내 묘한 허전함이 몰려왔다. 늘 바쁘게 달리던 삶이 멈추자, “이제 뭘 하지?”라는 질문이 따라왔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뭘까’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단지 생존을 위해, 남들과 비슷한 경로를 따라가기 위해 살아왔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찼고, 어떤 선택을 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런데 파이어 이후 갑자기 시간이 생기고, 아무것도 강요받지 않는 상황이 되자 나는 나 자신과 처음으로 마주해야 했다. 자유는 생각보다 낯설었고, 오히려 그 낯섦 속에서 더 큰 고민이 시작되었다.
2. 하고 싶은 일을 생각해본 적 없던 나
우리는 대개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 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다. 좋은 대학, 안정된 직장, 성실한 태도. 이 궤도를 따라 사는 데에 집중하다 보면,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나 역시 그랬다. 나를 소개할 땐 직장, 연봉, 성과를 얘기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말문이 막혔다.
어릴 적에는 좋아했던 것들이 있었다. 그림 그리기, 이야기 쓰기, 자전거 타며 동네를 누비던 시간. 하지만 그 모든 취향은 어른이 되면서 효율성과 실용성이라는 이름으로 밀려났다. 하고 싶은 일은 '쓸모없는 일'로 간주되었고, 나는 어느 순간 그 기억조차 지워버린 채 살고 있었다. 파이어 이후의 삶은 그 잊혀진 조각들을 다시 불러오는 시간이었다.
3.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의 가치
돈 걱정 없는 삶에서 처음으로 허락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억지로 책을 읽거나 스케줄을 짜지 않았다. 그냥 걸었고, 앉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무의미해 보이는 시간 속에서 내면의 목소리가 하나둘 들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취미들, 해보고 싶었던 일들, 나를 설레게 했던 기억들이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이 시간은 처음엔 낯설었지만, 점점 소중해졌다.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흐르는 구름을 지켜보는 일, 텃밭에서 잡초를 뽑으며 손끝의 감각을 느끼는 일, 그런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들이 오히려 내 삶을 다시 채워주기 시작했다. 그 안에서 나는 삶의 속도를 다시 조절하고, 외부가 아닌 내부의 리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4. 끌림의 순간들을 기록하기 시작하다
하고 싶은 일을 찾기 위해 나는 하루에 단 5분이라도 '내가 좋았던 순간'을 기록했다. 맛있는 커피를 마셨을 때, 좋은 문장을 읽었을 때, 자연 속을 걷다가 마음이 편안해졌을 때. 이 기록들은 내 감정의 지도를 그리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그 지도의 방향은 내게 분명한 힌트를 주었다. 나는 자연을 좋아하고, 글을 쓰는 걸 즐기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이런 기록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해주는 거울과도 같았다. 무엇에 기뻐하는지, 언제 마음이 차분해지는지, 어떤 활동을 할 때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지. 감정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하고 싶은 일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끌림은 강한 열정이 아니라, 반복되는 편안함 속에서 자란다.
5. 좋아하는 것을 일로 만들 필요는 없다
하고 싶은 일이 꼭 수익으로 연결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종종 '좋아하는 일 = 직업'이라는 공식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리지만, 돈이 목적이 아니라면 좋아하는 일은 그냥 '좋아하는 일'로 남겨도 된다. 파이어족이 된 나는 비로소 이 진리를 받아들였다. 쓰고 싶은 글을 쓰고,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배우고 싶은 걸 배우는 것. 그 자체로 충분했다.
좋아하는 것을 억지로 '성과'로 바꾸는 순간, 그 일은 의무가 되고, 즐거움은 줄어든다. 지금 나는 좋아하는 활동을 목적 없이 해보는 중이다. 누가 봐주지 않아도, 결과가 없어도, 그 시간 자체가 즐겁다면 충분하다. 그런 경험은 나의 내면을 단단하게 해주고, 삶을 더욱 충만하게 만들어준다.
6.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답게 지속하는 법
내가 좋아하는 일을 '나답게' 이어가기 위해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었다. 누군가는 하루에 10시간씩 몰두하며 뭔가를 이룰지도 모르지만, 나는 매일 조금씩 꾸준히 해보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이 글쓰기든, 사진이든, 요리든. 작지만 확실한 즐거움이 내 삶을 채워주었고, 그것이 나의 중심이 되어주었다.
중요한 건 나를 닮은 방식으로 지속하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피드백에 휘둘리지 않으며,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 그렇게 작은 루틴을 쌓아가다 보면, 어느새 그 일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 있다. 하고 싶은 일은 번쩍이는 열정보다, 조용한 꾸준함에서 피어난다.
7. 진짜 하고 싶은 일은 결국 '살아가는 방식'이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이란 꼭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보다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를 묻는 질문에 가깝다. 나는 지금 '바쁘지 않게, 성실하게, 의미 있게'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삶 속에서 하는 모든 활동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된다. 친구와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일도, 도시락을 정성껏 싸는 것도, 산책하며 노을을 보는 것도 그렇다.
하고 싶은 일은 하나의 직업, 하나의 프로젝트가 아니라, 삶의 태도에 가까웠다. 나는 나의 리듬에 따라 하루를 설계하고, 내가 의미 있다고 느끼는 일에 시간을 쓴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쌓여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를 더욱 분명하게 만들어준다.
8. 나의 생각
돈 걱정 없는 삶은 단지 편안한 삶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삶이다. 나는 이제 남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감정과 끌림에 따라 하루를 살아간다. 하고 싶은 일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나에게 의미 있고, 나를 설레게 한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하고 싶은 일은 어쩌면 우리가 평생 찾아가는 질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것을 애써 찾으려 애쓰기보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집중하고, 내가 느끼는 감정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그 과정 자체가 내가 하고 싶은 삶이며, 그 삶은 매일매일 다시 선택되고 있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매일 조금씩, 조용하게 나를 닮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삶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선택하는 태도에서 시작되고 있다.